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표트르 스톨리핀 (문단 편집) == 생애 == [[독일 연방|독일]] 주재 [[러시아 제국|러시아]] 특사인 아버지[* 아르카디 드미트리예비치 스톨리핀(생몰년도: 1821년 ~ 1899년)] 아래에서 자라, [[188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농업을 전공한 후[* 이 당시 스톨리핀을 가르친 교수 중 한 명이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이다.], 1889년부터 1902년에 [[카우나스|코브노]]에서 보안관을 지냈다. 당시 코브노는 농촌공동체의 해체가 진행되고 자영농의 비율이 높았던 지역으로써 스톨리핀은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농업과 관련하여 많은 경험을 하였으며 그는 농장 운영체제와 행정 체제를 개편하였다. 이러한 수완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아 그는 1901년 국회의원으로 승진하게 된다. 1902년 5월,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아 스톨리핀은 그로드노의 주지사로 임명받았으며, 1903년 2월, [[사라토프]]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사라토프]] 주지사로 재임하던 당시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파업을 젬스트보(земство)[* 러시아 제국의 지방의회]와 협력하여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자신의 지역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그는 시위에 나선 대중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비무장한 상태로 대중 앞으로 나섰으며 자신을 몽둥이로 때리려는 청년에게 자신의 코트를 던지고는 가지고 있으라고 말하고 대중들을 설득해 모두 귀가시켰다. 설득 도중에 누군가 자신을 총으로 겨누자, 당당하게 쏘라고 말하는 용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혁명 운동만 진압한 것은 아니었다. 극우 폭력 조직인 '''검은 백인대'''가 파업 중인 젬스트보 소속 의사들을 테러하려 하자, [[카자크|카자키]] 수백 명을 동원하여 직접 의사들을 기차역으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고 자신이 돌을 맞는 수모까지 감당했다. 이렇게 혁명 운동을 진압하고 치안을 유지하는데 남다른 수완을 인정받은 그는 1906년 4월 내무장관에 임명되고, 2달 후 고레미킨이 사임했을때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8월 25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대중 환영회를 하던 도중 급진 사회주의 혁명가 연합의 암살자들이 설치한 폭탄이 터졌으나 스톨리핀은 파편에 의한 부상만 입었을 뿐 멀쩡했다. 그의 15살 된 딸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나 딸과 같이 서있던 3살짜리 아들은 가벼운 상처만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후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요청으로 [[1906년]] 10월에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부상당한 스톨리핀의 딸을 방문했다. 이 테러 사건을 전후로 해 스톨리핀은 강력한 반(反) [[혁명]] 정책을 실시하고, [[혁명가]]들을 탄압해 수천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을 교수대로 보냈다. 이러한 스톨리핀의 행보는 혁명가들이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고 부를 정도로 냉혹했다. 그는 자신이 추진하려는 정책을 집행하고 법을 더욱 빠르게 통과시키기 위해서 [[두마]]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1907년]] 2대 [[두마]]를 해산시키고 혁명 세력과 접촉하던 15명의 의원을 체포한 후 귀족에게 더욱 많은 투표권을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3대 두마를 더욱 더 보수적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는 농민들의 불만을 해결하고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1차 두마 해산 이후에 입법한 [[토지개혁]]을 밀어붙였다. 당시 농업부 장관이었던 알렉산드르 크리보셰인의 도움을 받아 소규모 지주와 부농 · 자영농 계층을 만들어 이들이 황실을 지지하게 하고 농민들의 불안을 막으려 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고 지방 정부의 힘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10월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 및 정치 세력의 반대로 인해 실패했다. 1911년 3월, 그가 제안한 《토지개혁법》이 귀족들의 반대로 부결되고 [[두마]]가 혼란스러워지자 그는 직책을 내려놓았다. [[1911년]] [[9월 14일]], 그에 대한 [[암살]] 음모가 계획 중이라는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키이우|키예프]]에 공연을 보러 갔다. 공연 도중 그의 개인 경호원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나간 사이에 [[좌파|좌익]] 혁명가인 드미트리 보그로프에 의해 2번의 총격을 맞고, 쓰러지면서 즉시 황실로 이송되었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3일 후에 [[사망]]하였다.[* 이때 같은 자리에 있던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장녀 [[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올가 여대공]], 차녀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타티아나 여대공]]이 그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올가는 16세, 타티아나는 14세였는데, 그 충격적인 광경에 어린 두 공주는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드미트리 보그로프는 공연장 앞에서 바로 잡혔으며 암살 10일 후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스톨리핀의 암살은 [[니콜라이 2세]]와 귀족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스톨리핀은 그의 요청대로 사망 후, 자신이 죽은 키예프의 라브라 [[수도원]]에 묻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